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안시성 전투 (문단 편집) == 진행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IMG_5564.jpg|width=100%]] }}} || [[당나라]]의 군사들이 안시성으로 진격하기 시작하자, 안시성의 고구려군은 [[태종(당)|당태종]]의 깃발과 수레의 덮개 등을 발견하는 즉즉 성루에 올라가 북을 두드리면서 황제를 도발했다. 태종이 화를 내자 [[이세적]]은 >"성을 함락시키는 날 저들을 [[생매장|모두 묻어버리게]] 해주십시오." 라고 청했다. 이 소식이 성 내부에까지 들려오자 [[안시성]] 군사들은 이미 [[배수진]]을 쳤다고 생각, 더욱 굳게 지키기를 각오했다. 이후 여러 차례 공습이 시도되었으나 당군은 번번이 성벽을 넘는 데 실패했다. 이내 전투가 장기전으로 돌입하자, 당태종을 포함한 당군 수뇌부는 고뇌에 빠졌다. 이때 [[주필산 전투]]에서 패전한 고구려 항장, [[고연수]]와 [[고혜진]]이 안시성은 포기하고 오골성의 성주는 늙어서 공격하면 얼마 버티지 못할 것이니 오골성을 함락시킨 다음에 바로 평양성을 공격하자는 의견을 내놨다.[* 이는 어서 빨리 당군이 승리해야 자신들의 가족이 무사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당태종의 오른팔과 같았던 [[장손무기]]가 나서서 >"천자께서 직접 하시는 정벌인데 함부로 움직여선 안 됩니다. 지금 안시성을 포기하고 오골성으로 돌리면 분명 100,000명의 적군이 우리 뒤를 칠 것입니다.[* 《[[신당서]]》에선 [[장손무기]]가 [[안시성]]의 병력만 100,000명이라고 주장했고, 《[[자치통감]]》과 《[[삼국사기]]》에선 신성 + 건안성의 병력이 100,000명이라고 주장했다. 이병도의 경우 '《신당서》 기록은 중국애들이 뻥튀기 한 게 아니냐?' 라고 주석을 달아 의문을 제기했다.] 안시성과 건안성을 먼저 함락시켜야 합니다." 라며 반발하자 안시성 공략을 계속하기로 결정이 났다. 이후 안시성을 포위한 당군과 수성 중인 고구려군 사이에는 산발적 교전이 몇 주간이나 이어졌다. 당태종이 안시성에서 들려오는 닭과 돼지 소리를 듣고, >"성을 포위한 지 오래되면서 성 안의 연기가 미미해졌지만, 지금 닭과 돼지가 시끄러운 것은 군사들에게 잡아먹히고 밤 중에 나와서 기습할 것이기 때문이다." 라 여기면서 이세적에게 대비하도록 했다. 그 뒤 정말로 밤에 수백 명의 고구려군이 성벽에 줄을 매달아 내려왔고, 이 소식을 들은 당태종이 성 아래로 군사를 불러 공격해 수십 명을 죽이고 물러나도록 했다. 전투 말기, [[이도종]]이 무리를 감독해 성의 동남쪽 귀퉁이에 토산을 쌓고 안시성을 압박했는데, 안시성에도 이에 대응해 성을 더 높이 증축했고, 여러 차례 군사들이 교대로 싸워 하루에도 6번에서 7번 교전할 정도였다. 당군이 충차와 포석으로 성벽을 부수자 안시성은 목책으로 부서진 부분을 수리했으며, 이도종이 싸우다가 부상당했고 당태종 자신도 다치는 등 사상자가 점점 늘어났다. 이렇게 '''토산을 완성하는 데 2개월이나 걸렸다.''' 당시 당군은 토산을 쌓는 데만 '''연인원 500,000명'''을 동원했다고 한다. 우여곡절 끝에 토산이 완성되고, 꼭대기에서 성곽까지는 몇 장 정도 떨어져 있어 내려가 성 안으로 들어가게 했는데, 이도종은 [[부복애]]를 시켜 토산 꼭대기에서 대비하게 했지만, 부복애가 사사로이 부대를 거느리고 떠나고 있던 중에 [[고구려]]의 정예군 수백 명이 부서진 틈을 통해 기습에 성공, 토산을 빼앗아 점거하면서 참호를 파고 지켰다. 결국 당태종은 화가 나서 부복애를 참수하고, 조리돌렸으며, 이도종 또한 죄를 청했으나 개모성과 요동성을 함락한 공로가 있어 용서했다. 요동성이 일찍 추워지며, 풀은 마르고 물이 얼어 병사와 말들이 오래 머물지 못하고, 양식이 떨어지려고 하자 어쩔 수 없이 태종은 철수했다. 이때 당군의 퇴각 루트가 안시성에서 철수해서 요하 하류의 요택으로 가는 길이었는데, 기록에는 요택이 진흙창이라 겨울철에 병사들이 건너는데 몹시 고생해 태종 자신까지 나서서 병사들과 함께 수레를 밀어야 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미 요동성이나 백암성, 비사성, 개모성 등의 고구려 변방 지역 성들을 함락시켰으면서 그 길로 가지 않고 굳이 험한 길을 택해서 간 이유는 당군이 안시성에서 발이 묶여 있는 사이에 고구려군이 반격을 실시해 배후로부터 당군이 함락시킨 성들을 탈환하면서 당군을 압박했고, 이것이 당군의 퇴각이 굳이 요택이라는 험한 길을 택할 수밖에 없었던 원인이라고 해석하는 견해가 있다.] 태종 이세민이 최후의 자존심 때문에, 성주에게 성을 잘 지켰다는 공으로 비단을 하사하고, 품위를 지키며 퇴각하려 한 기록이 남아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